대림동에서 보낸 서른 번의 밤
1. 작은 중국
LITTLE CHINA



시사IN 신년기획
대림동에서 보낸 서른 번의 밤




김동인

사진
신선영

<시사IN>은 2018년 12월2일부터 2019년 1월2일까지 한 달간, 이곳에 거주하며 ʻ동네 주민’의 시선으로 이 지역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았다. 대림2동 대림중앙시장 인근에 위치한 작은고시원에서 서른 번의 밤을 보내며 통계와 법률로는 포착되지 않는 경계에 놓인 삶과 마주했다.
조화와 갈등이 복잡하게 반복되는 이곳에서도 생은 계속되고 있었다.

第1章


LITTLE CHINA




우리가 몰랐던 세계를 만나다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 상점 간판에는 중화요리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각(阁)·루(楼)·원(园)·옥(屋) 같은 으리으리한 단어가 없다. 그저 점(店)이나 관(馆) 따위 이름 붙은 ‘작은 가게’ 뿐이다. 중국풍 홍등이나 멋들어진 기와 장식을 찾기도 어렵다.


이동통신 매장은 위챗(중국 메신저 앱) 아이콘을 붙여두고, 식당 입구에는 틱톡(TikTok·중국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동영상 기반 소셜미디어) 아이디가 적혀있다. 상점에서 취급하는 물건도, 식당에서 주문할 수 있는 음식도 다르다. 목 좋은 곳에는 빠짐없이 여행사·행정사·환전소·이동통신 매장이 빼곡하게 들어섰고 간판은 대개 중국어 간체로 적혀 있었다.

LED 장식이 가로등 대신 길거리를 비추고, 향신료 냄새와 여기저기 울려 펴지는 중국어가 후각과 청각을 마비시킨다. 중국 소도시 하나를 통째 옮겨 놓은 듯 날 것 그대로다. 중국에 가 본 사람은 대림동이 ‘오늘날 중국’과 너무 닮아 놀라고, 중국에 가 본 적 없는 이들은 ‘머릿 속 중국’과 너무 달라 놀란다.

이곳은 작은 중국이다. 원주민 인구는 줄고 이주민 인구는 늘었다. 동네에 자리잡은 이들은 대부분 중국인, 그 중에서도 중국 내 소수민족 중 하나인 조선족이다. 우리 법은 이들을 ‘중국 동포'라고 지칭한다.


1990년대부터 한국을 찾은 재한 조선족은 2019년 현재 한국에서 집거지를 형성했다. 한국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은 채 한국인들 사이에 섞여 살던 이들은 이곳에 모이고 나서야 고향의 문화를 꺼내들 수 있었다. 소수민족이 주축이 된 중국식 집거지. 대림동은 전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독특한 ‘차이나타운’이다.

누군가는 낯선 풍경에서 막연한 공포를 느낄 수도 있다. 사람에 따라 그것은 자연스러운 경험이다. 낯선 감정과 두려운 감정을 두고 옳고그름을 논할 수는 없다. 다만 대림동이라는 물리적 지역과 그 안에 살고 있는 삶은 때때로 낯설다는 이유로 주목받거나 배제되는 경우가 생긴다. 최근 이 지역을 둘러싼 두 가지 사례가 그렇다.

대림동은 2017년 8월 영화 <청년경찰>의 개봉과 흥행으로 새삼 주목받았다. 영화에서 대림동은 가출 청소년을 납치해 난소를 적출하는 일당의 근거지로 묘사됐다. “여기 조선족들만 사는데 여권 없는 중국인도 많아서 밤에 칼부림이 자주 나요. 경찰도 잘 안 들어와요. 웬만하면 밤에 다니지 마세요.” 등장인물은 대림동을 이렇게 묘사한다.

대림동에 거주하는 재한 조선족(중국 동포·한국계중국인 등을 통칭) 커뮤니티는 공동대책위원회를 꾸려 제작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2018년 11월8일 1심 재판부는 “개인이 아닌 전체를 혐오집단으로 묘사했다고 보기 어렵다”라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2018년 10월2일 <동아일보>는 ‘서울 초교 첫 全(전) 신입생 다문화학생’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 대림2동에 위치한 대동초등학교 2018년도 신입생 전원이 다문화가정 자녀라는 내용이었다.

오보였다. <동아일보>는 “1학년 70명 중 54명이 다문화가정 자녀”라고 기사 내용을 수정했다. 그러나 초등학생이라는 ‘다음 세대’가 부각되며 대림동이 다시 주목받았다. 대림동 내 재한조선족 커뮤니티의 확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대림동에서 보낸 서른번의 밤

많은 사람들이 재한 조선족과 대림동을 구분하지 않고 말한다. 마치 대림동이 곧 재한 조선족이고, 재한 조선족은 다 대림동에 모이는 것처럼. 하지만 공간과 사람, 역사와 문화는 다양하다. 삶은 다채롭다. 외부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삶을 공간 안에서 보고 싶었다.

재한조선족은 왜 하필 대림동에 모이기 시작했을까? 동네는 얼마나 어떻게 변했고, 그곳에서 사는 삶은 또 어떨까? 대림동은 정말 위험할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동네 안에서 찾고자 ‘그냥 살아보자'는 결론을 내렸다. <시사IN>은 2018년 12월2일부터 2019년 1월2일까지 한 달 간 대림2동 시장 골목 인근 작은 고시원에서 서른 번의 밤을 보내며 이곳을 들여다 보았다. 원주민과 이주민, 정착민과 임시거주민을 만났다. 상인과 노동자, 아이와 어른, 대림동에서 일하는 사람과 대림동에서 잠만 자는 사람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삶과 일상과 생각을 물었다.

몸을 뒤척일 때마다 책상 모서리에 무릎을 찧었다. 38만 원짜리 고시원 침대에 누우려면 다리를 책상 아래로 집어넣어야 했다. 네댓 번 잠을 설치고 나서야 겨우 아침이 왔다. 이불 밖으로 얼굴을 내밀면 냉기에 콧등이 시큰했다. 고시원 투숙객 열에 아홉 사람의 모국어는 중국어였다. 방은 12개였지만, 화장실은 하나뿐이었다. 주말이면 지하1층 가라오케에서 2층 방까지 노랫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춥고 낯선 환경에 조금씩 적응하자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통계와 법률로는 포착되지 않는 경계에 놓인 삶을 마주했다. 조화와 갈등이 복잡하게 반복되는 이곳에서도 생은 계속되고 있다.

第2章


BIGFOREST




‘커다란 숲’에 사람들이 모이다

대림동은 의외로 작고, 생각보다 복잡하다. 대림1동은 아파트 재건축이 진행 중인 ‘안쪽 동네’다. 상가보다 주거지가 많다. 대림3동은 상대적으로 ‘젊은 동네’다. 정방형으로 구획된 평범한 서울 동네에 가깝다.

반면 대림2동은 미로처럼 뒤엉킨 옛 골목이 가득하다. 집은 낡았고, 길목은 좁다. 하지만 전통 시장을 중심으로 상권이 활성화되었고, 지하철 2·7호선 대림역과 2호선 구로디지털단지역이 인접해 있어 대중교통 이용도 편리하다. 서울 전역에서 모여들기 쉬운 동네이자, 서울 어디든 이동하기 편리한 동네다. 미디어에서 흔히 말하는 ‘대림동’은 대림2동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재한조선족은 얼마나 많이, 언제부터 이곳에 모여들기 시작했을까. 서울시에서 발표한 ‘등록인구 통계’를 통해 이주의 흐름을 짐작해볼 수 있다(아래 그래프 참조). 2000년 대림동 전체(대림 1·2·3동 합계) 인구는 총 8만2139명, 이 가운데 등록 외국인은 299명이었다. 대림2동만 놓고 봐도 내국인은 2만4254명이었지만 외국인은 89명뿐이었다. 상황은 2003년부터 2006년 사이에 급격히 변했다. 2003년 1378명이었던 대림2동 등록외국인수는 2006년 5073명으로 세 배 이상 급증했다. 이후에도 2007년 6408명, 2008년 8167명으로 꾸준히 증가한 대림2동 등록 외국인은 2018년까지 10년 간 8000명~1만명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

대림동 전체 인구 구성 변화
한국인
외국인
대림2동 인구 구성 변화
한국인
외국인

이게 전부는 아니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단기 체류자를 고려하면 실제 대림동 거주 외국인은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림동이 중국에서 온 이주민들에게 일종의 ‘관문(Portal)’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거주 중인 등록 외국인 수가 통계상 10년 동안 정체되어 있다고 해서 ‘2008년 이후 대림동 외국인 인구는 그대로다’라고 단정 짓기 어렵다. 오히려 이 통계에서 눈여겨볼 지점은 내국인의 이탈이다. 2000년 2만4254명이던 대림2동 내국인 인구는, 2018년 1만2758명으로 반 토막 났다. 최근 7년 사이 5200여 명이 감소했다. 내국인은 이탈하고 외국인은 늘고 있다.

왜 하필 대림동이었을까?

그 많은 동네 가운데 왜 하필 대림동이었을까.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재한 조선족의 이주 역사를 잠시 살펴 보아야 한다.

1978년부터 시작된 중국 정부의 개혁개방 정책은 상하이 칭다오 등 연해 지역의 성장을 이끌었지만 전통적 중공업 지역이던 동북3성(헤이룽장성·지린성·랴오닝성)은 오히려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이 지역에 모여 살던 중국 조선족은 1990년대 중국 내 연해 지역이나 대도시 외에도 한국·일본·미국·영국 등으로 일자리를 찾아 움직였다.

1990년대에는 이들이 한국에 장기 체류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제한적이었다. 체류 기간을 넘긴 채 한국에 불법체류자로 남는 이들이 늘었다. 이들 중 상당수가 1970~1980년대 구로공단 노동자들이 살던 ‘가리봉동 벌집’(1인용 방이 벌집처럼 배치되어 있고 공용화장실을 이용하는 구조)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한국 저임금 노동자의 열악한 주거환경은 그대로 중국 저임금 노동자의 초기 정착 터전이 되었다. 마침 가리봉동은 남구로역 근처의 인력시장과 가까웠고 영세 소기업과 각종 인력사무소가 모여 있었다.

음지에 있던 조선족 이주민들은 2004년 재외동포법 개정, 2007년 방문취업제도 시행을 통해 양지로 나올 수 있었다. 합법적이고 안정적인 거주가 가능하게 되면서 좀 더 나은 주거 환경에 대한 요구가 뒤따랐다. 마침 2003년 가리봉동 일대가 균형발전촉진지구로 지정되면서 세입자였던 이주민들이 주거 안정을 위협받기 시작했다. 방문취업제도 시행 이후 한국을 찾는 조선족 수도 급격히 증가했다. 신분 보장, 인구 증가, 상권 확대, 재개발 이슈가 결합하면서 재한 조선족 커뮤니티는 인근 대림동으로 재편되기 시작했다.

당시 대림동은 반지하 월세방일지언정 가리봉동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거 환경이 쾌적했다. 지하철 7호선 남구로역 인력시장과도 멀지 않았다. 여성들의 경우 강남 지역 식당을 오가기에 2호선이 다니는 대림동은 최적의 위치였다.

대림동의 독특한 부동산 구조도 한몫했다. 특히 재한 조선족의 이주가 집중적으로 이뤄진 대림2동은 아파트를 찾기 어려운 동네다. 과거 논밭이었던 이곳은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 사이 다가구주택 밀집지역으로 변신했다. 대림2동 대다수 주택은 당시 유행했던 건축 구조를 따르고 있다. 2층 독채에는 주인집이 살고 있고, 1층은 둘로 나누어 전세를 놓는다. 지층은 공간을 3~4개로 나누어 월세를 놓는 식이다. 여기에 옥탑방이 추가되면서 8가구 정도가 함께 사는 공동주거 공간이 완성된다. 주민들은 이런 집을 ‘대림2동 표준형 주택’이라고 불렀다. 지역 부동산 관계자들은 “대림2동이 아파트촌으로 바뀌긴 쉽지 않다”고 말한다. 한 대림동 토박이 부동산 공인중개사는 “1990년대에 집을 산 집주인들에게 월세 수익은 사실상 노후 생활자금에 가깝다. 이걸 포기하고 아파트로 전환하는 건 불가능하다”라고 말했다. 내국인 집주인과 이주민 세입자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셈이다.

사람이 모이자 상권이 성장했다

재한 조선족들이 몰리면서 상권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시작은 먹거리였다. 식재료를 파는 상점부터 연회가 가능한 대형 음식점(대주점)이 2000년대 들어 등장했다. 매주 토요일이면 대림중앙시장 골목은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이 몰렸다. 대림2동 주민뿐 아니라,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리며 곳곳이 인산인해였다. 지난해 12월은 연말이라 더욱 붐볐다. 크고 작은 식당마다 송년회가 열렸다. 이른바 ‘대주점(大酒店)’으로 불리는 연회장이나 ‘연변냉면’ ‘화룡냉면’ 같은 유명 식당은 예약 손님으로 붐볐다.

대림2동의 2013년 · 2018년 모습
음식점·식료품점
직업소개소·여행사·환전소·행정사·화물 무역
주점·커피호프·노래방
미용실·에스테틱·기타소매점(화장품·잡화 등 소매점)
종교시설(중국동포 대상)

대림2동 유동인구의 규모는 서울시 공공 빅데이터로도 확인할 수 있다. 서울시는 전체 행정구역을 1시간 단위로 쪼개 유동인구를 파악한다. 대중교통과 스마트폰 이용량을 분석해 추산한 결과다. 2019년 1월5일 토요일 기준, 중국 국적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 유동인구가 많은 장소와 시간대가 저녁 9시 대림2동(약 8070명)이었다.

1월 5일 토요일 서울시 중국인 유동인구 Top 10
대림 2동
그 외 지역
1월 5일 토요일 대림2동 유동인구변화

재한 조선족이 대림동이나 구로동에만 사는 건 아니다. 다른 동네에 살더라도 대림동은 필요에 따라 꼭 들러야 하는 공간이다. 시장과 식당, 일자리를 구하는 직업소개소 외에도 각종 여가를 보내는 곳이다. 중국산 게임을 할 수 있는 PC방과 당구장 외에도 각종 유흥업소가 몰려 있다. 장을 보고, 친구를 만나고, 생활 편의시설을 이용하며 일자리를 구한다. 각종 ‘정보’도 대림동에서 찾는다. 정부의 외국인 출입국 정책은 해마다 노동시장의 요구에 따라 변했다. 주기적으로 자진 신고 기간을 마련해서 불법체류 중인 이들을 제도 안으로 편입시키는 한편, 상황에 따라 입국 문호를 넓히거나 좁히기를 반복했다. 제도가 자주 바뀌다 보니 정보에 늘 귀를 기울여야 했다. 대림동에는 한국식 행정절차와 각종 서류 작업을 대행해주는 여행사나 행정사 사무실도 잇달아 문을 열었다.

15년 넘게 대림동은 성장과 변화를 거듭했다. 달라진 것은 동네 풍경만이 아니었다. 사람도 변했다. 경제적 환경과 이웃과 관계맺는 방식도 변했다. 무엇보다 ‘열악한 일터에서 일하는 조선족’이라는 오래된 오해가 무너졌다. 자수성가한 중산층 이주민이 탄생하면서다.

第3章


RAGS TO RICHES




자수성가한 조선족 3세대의 등장

모든 재한 조선족이 처음부터 한국 사회에 뿌리내리려 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잠깐 돈만 벌고 다시 돌아가려고 했어요" 10년 이상 한국에 머물고 있는 대림동 이주민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했다.

재한 조선족의 이주는 가족 단위로 확장된다. 혈혈단신 한국에 입국하더라도 안정적으로 체류하게 되면 가족과 친지가 연이어 건너오는 식이다. 2000년대 대림동 이주가 2인 가구 시대를 열었다면, 2010년대 대림동은 ‘3대가 모여 사는 삶’이 펼쳐진다.

“우리 같은 3세대들은 그나마 축복받은 세대다.”

장기 체류를 거쳐 3대 정착에 이르기까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들이 바로 ‘조선족 3세대’다. 경제활동이 가장 활발한 세대다. 대림동에서 가장 대표적인 동포 조직 중 하나인 한마음연합회 김용선(42) 회장은 조선족 세대 구분을 이렇게 설명했다.

“일제시대에 만주 땅으로 넘어온 1세대 동포들이 우리 조부모 세대다. 해방 직후 국경이 닫히면서(분단) 그대로 머물며 살다 우리 부모 세대인 조선족 2세대가 태어났다. 하지만 2세대는 문화대혁명 영향으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채 그저 농사만 지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같은 3세대들은 그나마 축복받은 세대다. 조선학교에서 한국어를 배웠고, 한국 사회에서 새로운 기회를 얻었다.”

굳이 한국으로 오지 않더라도 이들 3세대 조선족의 ‘이중 언어’ 능력은 중국 내에서 자산이 되었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칭다오(청도) 같은 연해 지역 대도시에 한국 기업이 대거 진출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중국 내 한국 기업에서 일하다 2010년대에 뒤늦게 한국으로 오는 이들도 늘었다. 한국 제조업 기업이 동남아 지역으로 이전하거나 사업을 철수하기 시작하면서다.

1970~1980년대에 태어나 상대적으로 교육받을 기회가 많았고, 이중 언어라는 자원을 가지고 있으며, 중국에 다양한 네트워크를 가진 조선족 3세대는 2010년대 ‘대림동’을 더 입체적으로 바꿔놓았다. 정착 초기만 해도 이들 3세대는 내국인보다 낮은 임금을 받으며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돈을 모아 상점을 열고, 조그만 사업을 시작하면서 ‘재한 조선족 3세대 중산층’이 등장했다.

자영업에서 무역업까지

3세대 중산층은 주로 자영업에서 성공을 거뒀다. 내국인을 상대로 영업하는 다른 동네와 달리, 이주민을 상대로 한 대림동은 국내 경기변동의 영향을 덜 받는다. 다른 지역과 달리, 프랜차이즈에 의지하지 않는 방식도 대림동 자영업자의 특징이다. 이들은 식당을 크게 열거나, 대림동과 구로동에 비슷한 점포를 여러 개 소유하면서 같은 재한 조선족이나 한족 출신 중국인을 고용하기도 한다.

무역업으로 성공하는 3세대도 늘었다. 초기 정착민인 부모 세대와 달리, 중국 내 네트워크가 많다는 것이 이점으로 작용했다. 특히 인기 있는 품목은 한국 화장품이다. 보따리상부터 정식으로 법인을 차려서 화장품 수출 사업을 벌이는 이들까지 규모도 다양하다. 이들 회사의 물류창고와 사무실은 비교적 덜 복잡한 대림3동에 모여 있다. 한국 상품을 중국으로 수출하는 권양석씨(49·가명)는 “한국 내 네트워크가 빈약하다 보니 중국 물품을 한국에 수입하는 사업은 어렵다. 하지만 중국 내 유통망은 우리가 더 빠삭하니까 괜찮은 한국 상품을 중국에 수출하기에 상대적 이점이 있다”라고 말했다.

안정적으로 한국 사회에 정착하며 영주권이나 국적을 획득한 이들의 등장은 대림동 인구 지형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2010년대 들어 3세대 중산층의 ‘재이주’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가족이 늘고 좀 더 안정적인 주거를 필요로 하는 대림2동의 3세대 중산층이 대림3동으로 많이 이사했다. 아예 대림동을 벗어나기도 한다. 그리 멀지 않은 수도권 지역을 눈여겨본다.

대림동을 벗어난 재이주 지역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집값이 저렴해야 한다. 먼저 이주한 재한 조선족이 있다면 더 좋고, 주변에 전통시장이 있다면 금상첨화다. 또 하나 중요한 조건이 있다. 지하철로 언제든 쉽게 대림동을 찾을 수 있어야 하는 곳이어야 한다. 이런 조건을 갖춘 가장 적합한 지역이 바로 인천 부평구 부평동과 과거 소사구로 묶여 있던 부천시 심곡본동, 소사동 지역이다. 2010년 12월 경기도 부천시와 인천시 부평구에 거주하는 재한 조선족은 각각 564명과 287명이었지만, 2018년 9월에는 부천시 7615명, 인천시 부평구 3892명으로 10배 이상 늘었다.

3세대 중산층은 오피니언 리더로 떠오르기도 한다. 이들이 조직한 단체는 1990년대 가리봉동을 중심으로 중국동포 인권운동을 주도하던 ‘교회 커뮤니티’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중국동포를 대상으로 활동하는 지역 언론사는 한때 20개가 넘었다. 이들 단체는 각종 봉사활동과 동포 지원 사업을 벌인다. 목표는 한국 사회에서 이주민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차별적 대우를 줄이는 데 있다. ‘중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삶’이 ‘한국에 뿌리내리는 삶’으로 바뀌면서 차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자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한국인은 1등 시민, 조선족은 2등 시민, 한족은 3등 시민

3세대 중산층이 등장했지만 오늘날 대림동의 근간을 이루는 이들 다수는 육체 노동자다. 대림동에 거주하거나 대림동을 거쳐 가는 모두가 중산층으로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대림동을 오가는 재한 조선족 가운데 다수는 내국인 평균 이하의 소득을 얻고 있다. 재외동포재단이 2016년 실시한 ‘국내 체류 중국동포 현황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가운데 54.6%가 연간 소득 2000만원 미만으로 나타났다. 1인 거주자 비율은 28.8%, 월세 또는 임시 거처에서 지내는 이들은 약 72.7%에 달했다.

대림동 곳곳에서도 이 같은 통계를 뒷받침하는 삶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고시원에 머무는 이들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가장 열악한 주거는 찜질방이다. 대림역 13번 출구 인근에 있는 한 대형 찜질방에는 캐리어 보관실이 따로 있다. 30~40ℓ 백팩을 들고 온 이들은 사우나 탈의실 라커 위에 가방을 올려두기도 했다. 사우나 탈의실 곳곳에는 건설 현장 안전모, 세탁용 비누가루, 작업복 등이 방치돼 있었다.

대림동에는 재한 조선족만 거주하는 게 아니다. 한국어가 낯설더라도 충분히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새로운 기회를 얻으려 한국을 찾는 한족 출신 중국인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일부는 투자 이민을 통해 한국에 들어왔지만, 꽤 많은 한족이 재한 조선족 사장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일하거나, 재한 조선족 ‘오야지(팀장)’가 이끄는 건설 현장에서 일한다. 대림동에서 만난 한 한족 출신 중국인은 “여기서 한국인은 1등 시민, 조선족은 2등 시민, 한족은 3등 시민이지 않나”라며 보이지 않는 차별이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중국에서 조선족이 소수민족으로 차별받는 것과는 반대 양상이 대림동에서 펼쳐지는 셈이다. 특히 한국에서 ‘언어(한국어)’는 일종의 권력이고 자산이 된다.

정부의 비자체계가 만든 경제적 분화

열심히 산 사람은 자수성가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아직 열악한 환경에서 지내는 걸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비자 체계에 따라 경제적 기회가 다르기 때문이다.

대림동을 돌아다니다보면, 유독 낯선 기호가 눈에 띈다. 알파벳과 숫자의 조합. C38, H2, F4, F5따위를 행정사, 여행사, 학원, 이동통신매장, 직업소개소 외벽에서 찾을 수 있다. 대림동에서 이 ‘암호’같은 기호는 한 사람의 경제적 형편과 법적 안정을 보여주는 일종의 신분증이다. 이 ‘기호화 된 신분’은 때때로 성공한 이주민과 그렇지 못한 이주민을 가르기도 한다.

2019년 현재 재한 조선족(한국계 중국인)은 몇 단계를 거쳐 가장 안정적인 ‘귀화’로 접어든다. 가장 기초적인 단계는 C38(단기체류)이다. 3년에 한 번씩 방문해 90일 동안 머물 수 있는 방문 비자(90일 복수 비자)다. 3개월간 머물며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기는 쉽지 않다. 친인척이 한국에 있어서 곧바로 재외동포(F4) 자격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방문취업(H2) 비자를 선택한다.

2007년에 제정된 방문취업제도는 중국 및 구소련 지역 동포를 위해 도입한 제도다. 이 제도를 통해 H2 비자를 받으면 최대 3년간 체류할 수 있다. 무연고 한국계 중국인, 즉 친족이 한국에 없는 경우에도 합법적이고 안정적인 체류가 가능해졌다는 데 의미가 있다. 방문취업제도 도입 이후 중국 내 조선족 사회에서 한국행이 가속화됐다.

H2 비자를 얻더라도 한국 사회에 뿌리 내리기는 어렵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중국에 돌아가서 재입국해야 한다. 좀 더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신분을 확보하고 싶은 이들은 자연스럽게 F4 비자에 눈을 돌린다. F4 비자는 중국으로 돌아갈 필요 없이 갱신만 하면 된다. 단순노무 업종을 제외하면 직업 선택의 자유도 H2 비자에 비해 폭넓게 보장된다. 60세 이상 재외동포는 F4 비자를 얻을 수 있는데, 60세 미만 재외동포는 국가 기술자격인 ‘기능사’ 자격증을 따야 F4 비자를 받을 수 있다. 대림동에 거대한 학원시장이 등장한 것은 이 때문이다.

체류자격별 재한조선족 체류 현황
단기사증 (C3)
연수·고용허가 (D3·D4)
결혼·동반·동거·거주 (F1·F2·F3·F6)
방문취업 (H2)
재외동포 (F4)
영주권 (F5)

서로 다른 법적 지위, 서로 다른 비자 상황은 곧 경제적 기회가 다르다는 걸 의미한다. 중국 지린성 룽징(용정) 출신으로 재한 조선족 커뮤니티를 10년 넘게 연구한 박우 한성대 교양교직학부 교수(37)는 “같은 재한 조선족이더라도 시민권이 부여된 경로·시기·자격이 각각 달랐고, 이를 바탕으로 개인이 획득하는 ‘기회 구조’도 달랐다”라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재외동포(F4)는 국민에 준하는 권리를 갖는다. 선거권·피선거권을 빼면 경제적 권리는 누릴 수 있다. 반면 방문취업(H2) 비자는 일종의 ‘동포 노동자’ 권리다. 비자가 끝나면 다시 나갔다가 들어와야 한다. F4는 전문직도 할 수 있고, 자본 소유도 가능하니까 여기서 쭉 살 수 있다. H2나 단기체류(C3) 비자는 동산 소유가 안 된다. 이 차이로 인해 F4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자본가가 출현했다. 안 그래도 인적자본과 사회자본이 다 다른데, 국가가 추가로 자격을 매겨준다. 여기서 분화가 촉발됐다. 한국 사회의 불평등 메커니즘과 닮았다.” - 시사IN 594·595호 “조선족 커뮤니티는 한국 사회 그 자체” 인터뷰 기사 中

第4章


MOTHER'S HOMELAND





4세대의 등장

“요즘 동네에 젊은 친구들이 많아졌다”

2010년 중반 이후 대림동은 새로운 변화를 맞이했다. 골목에서 아이들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대림동 주민들은 “최근 2~3년 사이에 대림동에 10대와 20대 젊은이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라고 말했다. 대림동에 터전을 이룬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나, 부모를 찾아 입국한 젊은 세대가 등장한 것이다. 이른바 재한 조선족 4세대의 등장이다.

어린 나이에 한국에 오거나, 아예 한국에서 태어난 4세대는 한국 사회에 쉽게 적응했다. 학교에서 한국 아이들과 다를 바 없다. 정작 부모들은 아이들이 ‘중국어를 할 줄 모른다’며 걱정스러워한다. 이중 언어를 경쟁력으로 삼았던 3세대와 달리 한국에서 한국 교육을 받고 자란 자녀들은 어쩔 수 없이 중국어가 낯설 수밖에 없다. 귀화를 원하는 이들이 늘어난 것도 이 때문이다. 다음 세대가 안정적으로 자라기에 오히려 한국 환경이 낫다고 판단하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중도 입국 자녀’로 중국에서 뒤늦게 건너온 4세대의 고충은 좀 더 복잡하다. 부모 없이 청소년기를 보낸 이들이 많다. 부모가 한국에서 자리를 잡는 동안 조부모 밑에서 중국식 교육을 받고 자란 이들은 한국에서 가장 먼저 언어 문제에 봉착한다. 특히 한국의 공교육 체계에 편입해야 하는 10대는 언어 문제로 교육과정을 제대로 쫓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의 적응 문제는 교육 문제에서 사회 문제로까지 확대된다. 동포지원센터 최승이 센터장은 “다른 동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구로·대림동 치안이 불안한 건 아니다. 다만 최근 들어 중도 입국 청소년 범죄 문제는 신경이 쓰인다. 이 지역 특성상 부모가 오랫동안 일하러 나가거나, 아이들을 제대로 돌봐줄 수 없는 가정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은 편이다. 가정이 흔들리면 청소년 범죄도 늘어난다”라고 말했다.

재한 조선족 3세대와 4세대가 어우러지는 대림동의 모습은 갈수록 더욱 입체적으로 변화한다. 40~60대 이주민에게 대림동은 고향 문화를 쉽게 접할 수 있는 공간이지만, 10~30대 젊은 층에게 대림동은 필요에 의해 들를 뿐 아주 매력적인 공간은 아니다. 세대마다, 처한 상황에 따라 대림동이라는 공간은 다르게 인식된다.

우리 안의 ‘타자’ 그들이 사는 세상

3세대에서 4세대까지. 서울 대림동에서 생을 일구는 다섯 사람의 일상을 쫓아가 보았다. 이주 경험을 가졌다는 것 외에는 나이·성별·하는 일, 대림동이라는 공간에 대한 생각까지 서로 다르다. 그 당연한 ‘차이’마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샤오룽바오에 담긴 중산층의 꿈

“일종의 도전이죠. 조금이라도 젊을 때 해봐야지 언제 해보겠어요.”
홍세화 (36·린궁즈멘관 사장)

대림동에 사는 내국인 주민들이 하나같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는 식당이 있다. 얼마 전 유명 맛집 소개 프로그램 제작진이 벌써 이곳을 촬영해 갔을 정도다. 중국식 칼국수와 샤오룽바오(小籠包)를 취급하는 ‘린궁즈멘관(임공자면관)’이다. 가게 주인 홍세화 사장은 ‘대장부’다. 호탕하고 유쾌하다. 지린시에서 처음 한국에 왔을 때만 해도 한국 식당에서 일하며 돈을 모았다. 신길동 신풍시장에 조그맣게 좌판을 열어 장사를 시작한 것이 점점 규모가 커졌다.

“딴 건 몰라도 내가 손맛 하나는 진짜 자신 있거든요.” 지금은 대림중앙시장에만 가게를 세 개나 가진 ‘3세대 중산층’이다. 홍씨에게 대림동은 베이스캠프다. 이제는 대림동에 안착했으니, 다음 목표를 세우고 있다. 최근 서울 신정동의 식당 자리를 인수했다. 중국 출신이 없는 동네에서 진짜 토종 한국인의 입맛을 공략해보고 싶어서다. “일종의 도전이죠. 조금이라도 젊을 때 해봐야지 언제 해보겠어요.”

그는 한국에 뿌리를 내리려면 한국인과 부딪치고 섞이는 걸 두려워하면 안 된다고 믿는다. 홍씨의 자녀도 신길동에 있는 초등학교에 진학했다. 이 학교는 중국 출신이 한 반에 많아야 3~4명이다. 대림2동으로 주소를 옮겨 중국 출신 학생이 많은 대동초등학교로 진학할 수도 있었다. 굳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아이가 크면서 같이 살아야 하는 이들도 한국 사람이잖아요. 자기가 자라면서 돌파해야지.” 홍씨가 신정동 사람들의 입맛도 사로잡을 수 있을까? 가게 이름은 일찌감치 ‘린궁즈’로 정했다. 작은 가게를 의미하는 ‘면관’이라는 단어를 뺐다. 좀 더 크고 번듯한 가게를 일궈보겠다는 다짐이다.

바른생활 사내 혹은 국경 없는 사내

“그나마 나머지 가족인 친척들이 모두 한국에 있으니까요.”
이현 (28·회사원)

중국동포지원센터에서 한국어 수업을 듣는 이현씨는 ‘바른생활 사나이’다. 정해진 일상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이씨는 충남 아산에 위치한 회사에서 일한다. 회사 인근 기숙사에 거주하지만 주말이면 가족과 친척을 만나기 위해 대중교통을 이용해 대림동으로 상경한다. 아산 외곽 지역에 있는 회사에서 버스를 타고 1호선 온양온천역으로, 이곳에서 다시 신도림을 거쳐 대림동까지. 버스를 기다리고 환승하는 데에만 편도로 총 4시간이 걸리는 여정이다.

이씨의 고향은 중국 상하이다. 친척들은 그가 어릴 때 한국으로 이주했고, 부모는 상하이에서 한국인이 세운 회사에서 일했다. 이씨가 20대가 되면서 가족이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부모는 한국인 사업가를 따라 미얀마로, 친척들은 대림동에 터전을 잡고 함께 살았다.

그는 중국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했다. 적성에 맞지 않아 새로운 일과 언어를 배우려 한국으로 건너왔다. “그나마 나머지 가족인 친척들이 모두 한국에 있으니까요.” 앞으로 무슨 일을 하면서 어디에서 살 것인지 어느 나라, 어느 도시에 뿌리를 내릴지 정하지 않았다. 다만 국경이라는 한계에 갇히지 않고 자유롭게 한국과 중국을 넘나들며 살고 싶다. 한국어도 그래서 더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아직 한국어가 익숙하지 않지만 조금 더디더라도 진득이 공부하는 게 목표다.

안정적인 삶을 위해 귀화를 선택한 사장님

“내 감천항 방파제를 지었는데 얼마 전에 태풍 땜에 쓸려 붓더라고. 하, 마음이 참 그렇데.”
김광용 (43·애민·루이국수 사장)

대림중앙시장에서 식당 ‘애민’과 ‘루이국수’를 운영하는 김광용 사장은 묘한 억양을 구사한다. 부산에서 오래 생활한 탓에 부산 방언과 경북 방언, 중국 동북지역 방언이 뒤섞였다.

“첨 왔을 때 암꾸도 없으니께네 한국인 형님이랑 계속 노가다를 뛰었거든. 내 감천항 방파제를 지었는데 얼마 전에 태풍 땜에 쓸려 붓더라고. 하, 마음이 참 그렇데.”

경북 포항에 살던 김씨 외가는 일제강점기에 만주로 넘어갔다. 김씨의 외삼촌은 ‘많이 배운’ 엘리트였지만, 문화대혁명 영향으로 지역에서 교사로 재직했다. 밥상머리에서 외삼촌은 김씨 형제에게 한국 역사와 사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느이 박정희를 아나? 박정희가 원래 만주에서 군관학교 졸업한 거는? 그이 한국에서 대통령이었는데….”


한국에 오기 전 그는 랴오닝성 다롄시에 공장을 세운 한국 신발회사에서 근무했다. 한국 조직 문화라면 이미 익숙했다. 김씨는 2007년 태어난 지 100일 된 아이와 아내를 두고 먼저 한국에 건너왔다. 경남 지역의 각종 건설 현장에서 일하다 2013년 대림동에 자리를 잡았다. 6년간 떨어져 지낸 아이에 대한 감정은 애틋했다. 지금 대동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는 어느새 중국어보다 한국어를 편하게 쓴다.

그는 안정적인 삶을 위해 귀화를 선택했다. 아직도 귀화 시험 보던 날 떨리던 마음을 잊지 못한다. “애국가를 4절까지 외워야 하는데 4절에서 자꾸 가사를 까먹는 거라. 어휴, 귀화 시험 진짜 어려운 거예요.” 현재 대림2동 월세방에 살고 있는 김씨의 꿈은 더 넓고 쾌적한 집에서, 아이가 좋은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는 것이다.

대림동보다 홍대 앞이 좋은 밀레니얼 세대

“이제까지 살아본 적 없는 다른 나라에서 살고 싶기도 해요.”
류향이(24·학생)

한국식 메이크업을 하고 롱패딩 점퍼를 입은 류향이씨는 한국의 여느 20대와 다를 바 없다. 류향이씨의 스마트폰에는 유독 가수 현아 사진이 많다. 당당하고 예뻐서 좋아한단다. 그는 한국에 온 지 채 1년이 안 되었다. 중국에서 제품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대학 졸업 후 한국행을 택했다. 어머니는 이미 류씨가 어렸을 적 먼저 한국에 왔다. 그에게 대림동은 어쩔 수 없이 들르는 동네다. 한국어를 배우고, 미용 관련 자격증을 따는 게 우선 목표다. 그러려면 중국동포를 대상으로 한 학원이 몰려있는 대림동을 들러야 한다.


하지만 류씨에게 대림동은 오래 머물고 싶은 동네는 아니다. 류씨 또래보다는 부모 세대가 좋아할 법한 상점과 시설이 몰려 있다. 대림동에서는 어른들을 위한 옌볜 가요 노래방이 많지만, 정작 그는 한국에 오기 전부터 케이팝 팬이었다. 또래 친구들과는 주로 홍대 앞에서 만난다. ‘코노(동전 노래방)’를 찾거나 친구와 거리를 돌아다닌다. 친한 친구는 류씨보다 먼저 한국에 들어와 지금은 유통업계에서 일한다. “일단 한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도록 공부한 다음에, 일본어나 영어를 공부하고 싶어요. 이제까지 살아본 적 없는 다른 나라에서 살고 싶기도 해요.”

‘전 세계 어디서든 살 수 있다’는 믿음과 의지를 가진 새로운 세대. 류씨는 이제껏 대림동이 품어온 이들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이주민이다.

낮에는 핸드폰 가게, 밤에는 자율방범대

“언젠가 텔레비전 드라마에 우리 이야기가 소재로 등장했으면 좋겠어요. 각자가 가진 사연과 역사가 많거든.”
윤금애(45·스마트폰 매장 운영)

“철모르던 시절에는 한국에 가기만 하면 돈이 하늘에서 우수수 떨어질 줄 알았어요. 근데 그게 아니더라고.”

처음 한국에 올 때만 해도 자신만만했다. 윤금애씨 조부모는 경북 상주에서, 외조부모는 경북 고령에서 일제강점기에 만주로 넘어왔다.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 인근 상즈(상지) 시. 부모는 이곳 조선인 마을에서 태어나고 결혼해 하얼빈에서 터전을 일궜다. 군인 출신 아버지는 공무원으로 성공하고 싶었지만, 조선족이라는 이유로 유리천장에 부딪혔다.

유년 시절은 상대적으로 유복했지만, 중학생 때 아버지가 임종하며 집안이 기울었다. 윤씨 어머니는 돈을 벌기 위해 1994년 한국으로 떠났고, 윤씨도 스물여섯이던 2000년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2001년에서 2004년까지 대림2동에 있는 친구의 반지하 방에 얹혀살면서, 강남 신사동에 있는 식당으로 매일 출퇴근했다. “처음에는 무조건 돈 모아서 중국으로 돌아갈 생각만 했어요. 옷도 한 벌 가지고 계속 돌려 입고.” 인생에서 가장 숨 가쁘고 치열하게 살던 때, 힘이 되어준 사람을 만나 결혼했다. 그는 남편이 살던 안양에서 핸드폰 매장 일을 배웠고, 지금은 대림역 4번 출구 인근에서 스마트폰 매장을 운영한다. “언젠가 텔레비전 드라마에 우리 이야기가 소재로 등장했으면 좋겠어요. 각자가 가진 사연과 역사가 많거든.”

주말 밤 가게 문을 닫고 ‘자율방범대’ 옷을 챙겨 입던 윤씨가 이렇게 말했다. 지난 1년 동안 그는 “중국동포에 대한 이미지가 좋아졌으면…” 하는 생각으로 대림역 인근 자율방범대 활동을 이어나갔다. 20대는 너무 빨리, 힘들게 지나갔지만 그는 이제 정착민으로 한국에 뿌리를 내렸다.

第5章


LIVING WITH





대림동 사람들은 칭다오(청도) 맥주를 즐겨 찾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얼빈 맥주가 인기 있는 것도 아니다. 대림동 거주 생활 3주차에야 체감한 사실이다. 이곳에서 가장 인기 있는 주종은 ‘카스’다. 만취한 손님들 테이블에는 파란색 딱지를 붙인 카스 맥주병이 쌓여 있었다. 식당에서 칭다오 맥주를 주문하는 목소리가 들리면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리게 된다. 열에 일곱 여덟은 표준 서울말을 구사하는 내국인이었다. 밖에서 생각한 것과 안에서 보는 건 달랐다.

“나도 언젠가 양꼬치 가게를 열고 싶어요.” 많은 재한 조선족이 자신의 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실제로 서울에 양꼬치 가게가 늘어난 2000년대 중반은 재한 조선족 자영업자들이 늘어난 시기와 일치한다. 박우 박사는 “양꼬치 식당이 등장하기 시작한 게 2005~2006년이다. 처음에는 공사장에서 일하고, 그러다 돈을 모아 가게를 여는 식으로 자본을 축적했다. 결국 지역에서 여러 목소리를 내는 건 사장님들이다. 커뮤니티 안에서 소위 중국동포들의 권익을 위해 목소리 내는 사람 중에 노동자가 없었다. 자영업을 하는 ‘프티부르주아지’가 지역 담론을 대변하고 대표하는 모습이 포착됐다”라고 말했다.

양꼬치가 재한 조선족이 지닌 ‘자영업의 꿈’ ‘중산층의 꿈’을 의미한다면. 칭다오 맥주는 한국 사람들이 즐겨 찾는 중국 문화의 일부분이다. 이 둘은 어느새 한국 사회에 뒤엉켜 안착했다. 함께 살기. 좋든 싫든 대림동을 넘어 한국사회는 재한 조선족과 공존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공존에는 자연스럽게 충돌도 뒤따른다. 2018년 12월11일 KBS 팩트체크K 팀이 ‘조선족은 강력범죄의 원흉인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서울 대림동 구석진 식당에서 시라지국(시래깃국)을 우물거리며 이 기사를 읽었다. 댓글을 살펴봤다. “기자님께서 먼저 대림동이나 신풍, 가리봉동 이런 조선족 동네서 살아보시죠. 일주일도 못 살고 도망 나올걸.” “밤에 대림동 가보면 이런 기사 절대 못 씁니다. 쪽수 적은 한국인들만 가려서 시비 걸고, 지들끼리 웃고, 지나가면 성희롱하는 게 조선족 패거리들인데.” “책상에 앉아서 숫자 비교하지 말고 조선족 밀집지역에서 직접 몸으로 한번 겪어보든가. 기자 완장 이런 거 두르지 말고 일반인 취객처럼 한번 돌아다녀봐.”

내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을 대림동 외부에서는 ‘위험신호’로 인지한다. 치안에 대한 우려도 정작 동네 내부에서 바라보는 시선과 외부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다. 대림동에서 오랜 기간 지낸 내국인 가운데 “시장 골목은 조금 낯설고 무서워서 잘 가지 않는다”라는 이들도 있는 반면 “여기서 수십 년 살았지만 ‘칼부림’ 같은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라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다수다. 오히려 재한 조선족들은 “비자 문제 때문에 경범죄도 저질러선 안 된다”라고 설명한다. 과태료나 벌금 기록이 남을 경우 재외동포(F4) 비자를 가지고 있더라도 연장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몇 년에 한 번씩 ‘한국 거주 자격을 심사받는’ 이들로서는 범죄기록을 늘 조심할 수밖에 없다.

재한 조선족이 모여든다는 이유로 대림동을 서울의 대표적인 슬럼처럼 묘사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이미 대림동은 서울 서남권에서도 손꼽히는 상업지역이다. “영화 <청년경찰>이 대림동에 대해 안 좋은 이미지를 확대하기도 했지만, 반대로 그만큼 호기심도 불러일으켰어요. 실제로 맛집을 찾아 대림동에 오는 사람도 많아요.” 한 재한 조선족 상인은 최근 몇 년 사이에 대림동에 생겨난 변화를 이렇게 설명했다. 실제로 대림동에는 언론을 통해 이름을 알린 식당과 상점이 하나둘 등장했다. 주민들 역시 대림동이 서울에서 ‘들러볼 만한 에스닉타운(이색적인 동네)’으로 자리매김해 사람들이 활발히 오가는 게 가장 긍정적인 미래라고 생각한다. 일부는 시 차원에서 대림동을 ‘차이나타운 특구’로 지정하기를 바라기도 한다.

대림동에서 직접 살펴본 ‘함께 살기’는 어땠을까. 대림동 바깥에서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을 문답으로 정리해 보았다.

살을 맞대며 살아보니 이렇더라

Q. 대림동은 치안이 불안하다. 칼 맞아 죽은 사람도 있다던데?

많은 사람이 궁금해하고, 동네 분들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질문입니다. 실제 2017년 12월 우발적 살인이 한 차례 일어난 바 있기 때문이죠. 피해자와 용의자는 모두 재한 조선족이었습니다. 용의자는 당시 다툼 끝에 피해자를 칼로 찌르고 급히 고향 하얼빈으로 떠났습니다. 어머니의 설득 끝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자수했죠. 2017년은 대림동 중국 동포 단체들이 영화 <청년경찰> 상영 반대 운동을 벌인 해이기도 했습니다. 동네 이미지 개선을 위해 노력했지만 마침 영화 <범죄도시> 흥행과 이 사건으로 인해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았다고 합니다. 어쩌다 한번 일어난 우발적인 일이라 해도, 동네 바깥에서는 ‘저기 원래 저러나 보다’ 생각하기 쉽죠.

그렇다면 실제 이 동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범죄에 대한 공포’를 얼마나 체감하고 있을까요? 대림동 토박이 한국인을 만날 때마다 같은 질문을 반복했습니다. “중국에서 이주해온 분들이 칼을 소지하고 있거나, 서로 흉기로 위협하며 다투는 모습을 본 적이 있나요?” 제가 만난 한국인 가운데 직접 그런 장면을 봤다는 분은 없었습니다. 이 질문을 던졌을 때 돌아오는 반응도 한결같았습니다. “다른 동네 사람들한테도 비슷한 질문을 많이 받았다. 일상적으로 칼부림 나는 동네는 아니다.”

질문을 바꾸어보았습니다. “실제 이 동네에 살면서 치안이 불안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나요?” 반응은 조금 갈렸습니다. “처음에는 좀 낯설고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다”부터 “딱히 그런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까지. 오히려 귀화한 조선족 출신 주민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10년 전 처음 왔을 때에는 나도 이 동네가 낯설고 조금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동네가 정비되고 사람도 많아지면서 그런 생각은 안 들게 되더라.” 제가 대림동에 사는 동안에는 어땠냐고요? 1월1일 새벽 동네 맥줏집에서 한 번,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긴 했습니다. 동네 술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장면이었죠.

Q. 조선족은 중국인인데 왜 스스로를 동포라고 부르나?

엄밀히 말해 ‘동포’는 법적 개념입니다. 재외동포법에서 규정하는 동포는 재외 국민과 한국계 외국인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중국 지역으로 이주한 한국인의 자녀들 역시 동포에 포함됩니다. 한국계 중국인 3세대까지는 재외동포법에 따라 동포 지위를 얻을 수 있습니다. 재미동포·재일동포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흔히 ‘조선족’이라 부르는 이들은 재중동포에 해당합니다. 다만 ‘재중’이라는 단어가 현재 중국에 살고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한국에 살고 있는 이들은 중국에서 온 동포라는 의미로 ‘중국동포’라 통칭하고 있습니다. 결국 한국계 중국인·재중동포·중국동포·조선족은 비슷한 말입니다.

정체성 호칭은 상당히 정치적인 개념입니다. 한국 사회가 그동안 ‘조선족’이라는 말에 다소 부정적 의미를 담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한국과의 연결고리를 강조하기 위해 동포라는 개념을 더 자주 사용하기도 합니다. 일상에서 동포라는 개념은 때때로 정반대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동포라는 표현만으로는 재한 중국동포를 의미하는지, 재중 한국동포를 의미하는지 모호해지기 때문이죠. 이미 귀화한 사람들은 ‘내국인’에 해당되기 때문에 동포 개념에 맞지도 않고요.

“조선족이 중국인이지 어떻게 동포냐”라는 말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립니다. 귀화하지 않은 재한 조선족은 중국 국적을 가진 사람인 동시에, 동포이기도 합니다. 실제 대림동에 살고 있는 재한 조선족들도 ‘동포’ ‘조선족’ ‘한국계 중국인’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합니다. 일부 이주민들은 ‘조선족’이라는 소수민족성을 나쁘게 볼 필요도 없다고도 설명하더군요. 참고로 우리한테 꽤 익숙한 ‘교포’라는 표현은 공식적으로는 ‘동포’라는 표현으로 대체하고 있습니다.

Q. 대림동에 불법체류자가 많지 않나?

과거에는 불법체류자가 많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재외동포 비자를 받는 게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거든요. 2007년 방문취업제도가 실시되면서 방문취업(H2) 비자를 받는 이들이 늘었고, 불법체류자를 양지로 끌어올릴 길도 열렸습니다. H2 비자를 받은 이들 가운데 한국에서 재외동포(F4) 비자로 전환하는 경우도 늘었고요. 재한 조선족의 경우 다른 외국인에 비해 ‘한국에 합법적으로 체류할 수 있는 길’이 넓은 편입니다.

지난해 10월14일 송기헌 의원실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8년 8월 기준 중국 국적 불법체류 비율은 6.7%에 불과했습니다. 타이·카자흐스탄·몽골 국적에 비해 월등히 낮은 수치였습니다. 대림동 이주민 커뮤니티의 구성원 다수가 중국 국적을 지녔다는 점을 감안하면, 동네를 오가는 이들 가운데 불법체류자의 비중은 낮다고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불법체류 신분으로 이 동네에 머물기에는, 월세도 비싸고요.

Q. 중국인 상점에 가면 한국 사람은 쫓겨난다던데? 대림동 PC방에서 한국인이 쫓겨났다는 기사도 났는데?

이 지역 상점에 고용되어 일하는 사람들 중에는 한국어를 잘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꽈배기 하나를 사기 위해 보디랭귀지를 동원해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상점도 물건 사겠다는 손님을 쫓아내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다만 편의시설 사정은 조금 달랐습니다. 가령 PC방은 중국에서 널리 쓰이는 ‘PC방 관리 프로그램’이 깔려 있습니다. 한국 PC방에 넥슨, 피망 같은 퍼블리셔의 게임 클라이언트 프로그램이 깔려 있는 것과 마찬가지죠. 대림2동에 위치한 한 PC방 매니저는 “죄송하지만 설치된 프로그램 자체가 중국 서버만 접속이 가능하도록 세팅되어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모든 사업장이 그런 건 아닙니다.

Q. 대림동에 가보면 쓰레기, 담배꽁초로 난리도 아니라던데…

쓰레기와 흡연 문제는 대림동의 오랜 숙제가 맞습니다. 대림동에서 의외로 많이 볼 수 있는 게 바로 CCTV와 전봇대 앞에 놓아둔 테이블입니다. 테이블은 전봇대 옆에 쓰레기를 슬쩍 두고 가는 사람을 막기 위해 설치됐습니다. 그래도 “요즘은 그나마 나아졌다”라고 말하는 주민이 많습니다. 오래 거주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한국식 분리배출에 많이 익숙해졌다는 겁니다.

담배꽁초 투기나 흡연 문제에도 일부 문화적 차이가 있습니다. 저도 대림동 고시원에서 지내며 가장 힘들었던 문제가 실내에 찌든 담배 냄새였습니다. 밤늦은 시간에 사람이 몰리는 호프집·당구장·PC방 역시 한국 법에 따라 대부분 실내 흡연을 금지하고 있지만, 일부 2·3층 영업장에서는 늦은 시각이면 실내 흡연을 방치하기도 했습니다.

Q. 한국 상인이 오히려 대림동에서 쫓겨나는 것 아닌가?

대림동에서 일종의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나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전까지 대림동은 동네 사람을 상대로 장사하는 상점이 많았습니다. 2010년대 들어 외부에서 방문하는 유동인구가 늘어나면서 많은 상점이 중국인을 위한 편의시설로 바뀌었습니다. 일부 상가는 아예 중국어가 가능한 직원을 고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업종에 따라 여전히 내국인이 장사를 이어가는 경우도 많습니다.

젠트리피케이션의 주된 원인은 상가 임대료 상승입니다. 마진이 크게 남지 않는 유통업은 동네에서 상대적으로 빠른 시간에 도태됩니다. 최근에는 중국 식자재나 물품을 파는 유통업이 임대료 상승을 견디지 못하는 경우도 생겼습니다. 동네 대형마트에서도 기본적인 중국 식자재(중국 무, 모충, 진달래, 초두부, 중국술 등)를 팔기 시작하면서 내국인·외국인 할 것 없이 유통 매장이 위태로워지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해 한국인만 피해를 당한다고 보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경계에 선 사람들과 함께 살기

1992년 한·중 수교를 기준으로 보면 재한 조선족 이주 역사는 올해로 27년째다. 대림동의 변화는 이들이 한국 사회에 적응하며 뿌리내리는 과정이 반영된 결과다. 새로운 세대의 출현은 이들의 체류를 ‘정착’으로 바꿔놓았다. 정착에는 갈등이 따른다. 정체성과 차별의 문제가 찾아온다. 대림동에서 시흥동으로 옮겨 가정을 일구어 살고 있는 김정필씨(가명·33)는 한국에서 지내는 삶을 ‘세련된 차별의 연속’이라고 말한다. “좀 친해진 한국인들도 ‘한국과 중국이 축구 경기를 하면 어디를 응원할 거냐’는 질문을 생각 없이 던진다. 이런 질문은 ‘엄마가 좋냐, 아빠가 좋냐’는 질문과 마찬가지다. 어렸을 때부터 한국은 모국이고 중국은 조국이라고 배우며 자랐다.” 김씨는 중국에서도 ‘소수민족’이라는 경계에 선 삶을 살아왔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기사 나가면 악플이 달린다는 걸 잘 안다. 우리한테 ‘짱깨’라고 욕하는 거 다 안다. 그래도 우리 목소리와 우리 삶, 우리가 가진 고민이 대림동 밖으로 알려졌으면 좋겠다.”

“그냥 여기 지내면서 본 것 그대로 써 주세요. 나쁜 걸 봤으면 나쁘다고. 아닌 건 아니라고.”

대림동에서 한 달을 지내는 동안 기자가 되기 전 타지에서 체류하던 시절을 자주 떠올렸다. 늘 음식이 문제였다. 얼큰한 국물이 떠오를 때면 인스턴트 라면으로 허기와 그리움을 달랬다. 대림동은 미국 서부 한인 타운과 닮았다. 전세계 곳곳에 흩어진 H마트(한인 상품을 취급하는 슈퍼마켓 체인. 미국 전역과 유럽 일부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도 떠올리게 한다. 김치찌개 한 그릇에 미화 10달러 넘게 내야했던, 그마저 감사히 먹으며 국물까지 비워내던 옛 기억이 떠올랐다. 이주민 집거지가 만들어지는 원리가 우리라고 다를까.

대림동은 우리가 몰랐던 세계, 혹은 애써 들여다보지 않았던 세계에 가깝다. 한 편으로는 우리가 사는 다른 동네와 별반 다를 바가 없고, 다른 한 편으로는 무척 역동적으로 변하고 있다. 대림동은 앞으로도 계속 구성과 형태, 외양과 내부 질서가 바뀌며 움직일 것이다. 세대가 교체되고, 삶이 다채로워지면서 점점 기존 한국 문화와 융화될 수밖에 없다. 한 거주민은 이렇게 말했다. “조선족은 곧 없어질 겁니다. 적어도 한국에서는요. 아이들이 여기서 자랄 수밖에 없으니까요. 자연스럽게 스며들 겁니다” 2019년 대림동은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 바라본 ‘그 모습’과는 분명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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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동에서 보낸 서른 번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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